졸업(1): 감사만이 아닌 인생
눅17:11-19
졸업시즌에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있습니다. 힘든 과정을 마치고 행복해 하는 얼굴들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가족들이 수고한 자녀를 격려하는 소리도 빠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지금까지 동고동락했던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 꼭 껴안고 서로 위로해 주는 그런 모습들이 너무 좋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정말 힘든 삶을 함께했던 사람들입니다. 한센병으로 알려진 나병환자들은 지금이나 그때나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극도의 고독함을 경험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나름대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사랑이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하고 서로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10명 정도가 그룹을 이루며 살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것을 하나 발견합니다.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 때는 서로 처다 보지도 않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면 돌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힘든 일이 생기자 서로 저주하고 무시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함께 한다는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입니다. 삶의 바닥은 너와 나의 경계가 없는 것입니다. 서로
인정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여러분 곁에 계신 분이 내가 힘들 때 도와주고 기도해 주는 동료임을
기억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다시 보기 바랍니다. 같은 아픔을 가졌던 그들에게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주님 때문에 병이 나았습니다. 함께 너무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고통 가운데 모든 것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감사에서는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분명 감사해야 할 사람은 10명인데
아홉을 제외한 오직 한 명만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감사의 생활은 다른가 봅니다. 그 한 사람만이 감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자신에게 진정한 도움을 준 사람을 잊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감사는 늘 감사하게 만드는 상대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혜택을 준 사람이거나, 어려운 가운데 위로가 된 분들이거나,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은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위키백과 참조)
그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은 너무 불우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거의 죽을 지경에서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자라던 시기에 유럽에 2차 대전이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배고픔을 다시 한번
더 겪어야 했습니다.
그때 당시
구호단체인 국제연합아동구호기금(UNICEF)이 나눠주는 빵으로 겨우 위기를 넘겨 나가는 시절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럽의 나라를 돌며 결국 유명한 영화배우가 됩니다. ‘로마의
휴일’등의 영화로 알려진 오드리 햅번입니다. 유명세를 경험한
후 그녀는 1989년 UNICEF홍보대사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미 세상에서
유명해진 사람들이 아프고 힘든 사람을 돕는 것은 참 보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대장암으로 죽기까지
그 역할을 수행하며 전세계의 가난에 굶주린 어린이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자신이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
도와 주었던 단체를 위해 섬김의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반대로, 많은
세상 사람이 은혜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본문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10명의 환자들이 주님의
말을 듣고 제사장께로 달려 갑니다. 싸매었던 천들 사이로 정상으로 변한 손을 발견합니다. 서로를 보며 놀랐고 너무너무 기뻐했을 것입니다.
9명은 너무
좋아 제사장에게서 확인을 받고 집에 갈 생각이 가득합니다. 우리도 비슷할 것입니다. 어려운 학교 견뎌내어 학위를 받았다는 기쁨만이 있다면 감사가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학위와 명예를 갖도록 이곳에 보내시고 꿈을 허락하신 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만이 달랐습니다. 그 환희 가운데 정신을 차리고 뭔가를 생각합니다.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은 오직 메시야 뿐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말씀하셨던 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때 동료들에게 자신의 깨달음과 믿음을 외쳤을 것입니다.
‘야! 우리 지금 메시야를 만난 거야. 우리에게 명령하신 분이 바로 메시야야.’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메사야이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나는 불치 병에서 완쾌되었어. 나 스스로 일하고 돈도
벌고 자식들도 키울 수 있어. 어느 누구의 집에서 구걸도 필요하지 않아.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어.’
이젠 더
이상 메시야도 필요 없어. 아니 어떤 사람의 도움도 필요 안 해. 살
수 있는 건강이 있어. 고쳐준 것 감사한데 집에 돌아가 내 아이를 안아줄 기쁨보다 크지 않아. 나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뵈러 가야 해. 지금껏 구상해왔던 비즈니스를
윤영해야 해. 대박 날 거야. 나는 내 사랑스런 애인을 만나야
해.’
‘안 가긴
너무 미안하니 우리 지금 말고 나중에 가면 안될까?’ 뭐 이런 말들이 그들 사이에 오고 갔을 것입니다. 모두들 자신들이 가진 이유 때문에 주님께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불가피한 사정과 이유 때문에 주님께 드려야 할 감사를 잃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의 감사만을
최종적으로 받기를 원하시는 분일까요? 사실 세상
사람들도 은혜를 입으면 와서 감사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받는 입장이기에 감사만 받으시면 ‘그래 잘했어 내가 원하는 것 했으니 좋아.’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아니기에 말씀의 묵상이 있는 것입니다. .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이 주님께 취하는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16절을 보면 그는 우리 주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며
감사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배의 정의입니다. 죽을 수 박에
없던 병에 걸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진정 감사하는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배자가 되는 것을 주님은 진정 원합니다. 예배에는 진정한 감사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돈을 가지고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고쳐주었기에
일평생 신학교가서 헌신하겠다고 다짐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가지고 있는 것 두 가지를 내어 보입니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겸손한 태도와 치유케 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구원주임을 믿는 믿음을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입니다(18절). 여러분의
학위나 성취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학위는 이 코넬에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학위를
가진 분이 진정 이런 고백을 하느냐를 원합니다. ‘내가 얻은 것이 모두 하나님이 이룬 것입니다.’ 수고하여 얻은 성취의 기쁨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은 학위를 가지고 예배 자리로 나아왔습니다. 주님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이런 진정한 감사와 복된 믿음이 우리들 가운데 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