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1): 약속으로 주어지고 고난으로 확인하며 은혜로 완성됩니다
창12: 1-13
졸업도 마무리되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된 것 같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한 주제를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늘 성도의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성경 인물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알아가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12장 1-3절은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에게
땅을 주실 것이고, 그를 통하여 한 민족을 이루고, 더 나아가
그가 세상을 축복하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브람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약속(언약)이라는 수단을 통해 분명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시하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5절에서 보여집니다. 그곳에서 그는 ‘단을
쌓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실한 모습을 7-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소망이 넘치는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할 수
없이 살기 위해 애굽을 향해 점점 이동을 하게 됩니다(9-10절).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환경의 변화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없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명확하지만 주변의 환경에 사로잡힐 때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결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환경의 변화에 대한 민감성은 있어야 하지만 환경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애굽으로 상징되는 세상이
나를 살려줄 것 같은 가능성으로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환경을
통해 우리의 생존이 위협당할 때 무시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너무 강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현실’이라
부릅니다. 죽을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우리의 눈에 살 길처럼 보이는 다른 길을 찾아 헤매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안도감을 주는 유혹을 선택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받은 약속을 뒤로하고 내가 처한 형편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길을 찾아갑니다. 아브람에게는 나일강이 있어 배고픔이 없어 보이는 애굽이 바로 유혹이었고 그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10절의
‘거류하다’는 말은 오랫동안 산다는 것이 아니라 잠깐 머물겠다는
뜻입니다. 합리적인 타협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좋은 현실을
주지 않으면 사람은 늘 차선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원히 애굽에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기근이 사라질 때까지 머물겠다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런 태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합니다.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 우리가 타협하는
것을 인정해 주실까요? 아니면 비를 주지 못하는 무능력으로 인해 자존심 상해 뒤로 물러 나 계실까요? 그래서 아무 소리 없이 침묵만을 일관할까요?
다르게 말하면, 이런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하느냐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기 바랍니다.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이
두 구절이 어떤 의미를 던져 주고 있습니까?
아브람이 애굽 국경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을 때 덜컥 겁이 나는 것을 봅니다.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게 한 것은 결국 그를 멈추고 싶어 한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전달 되는지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위험에 대한 본능을 통해 알려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그러면 왜 제단을 쌓을
때는 주지 않았는지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지 않았을까요? 우선, 아브람의 기도가 형식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침묵은 지금까지 보여준 뜻을 따르라는 답입니다. ‘변함이 없다. 흔들리지 마라. 그
길이 험해도 가라’ 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기근으로 굶어 죽어도 가나안 땅에 머물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응답에 더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함을 보여주십니다. 기도에
대한 무응답의 경우 사람들은 내 것이 더 맞을 것이라는 무모한 도전을 시도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큰
유혹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나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민 9:8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기다리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어떻게 명령하시는지 내가 들으리라.” 기다리고
들릴 때까지 우리는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아브람이 기근으로 가나안에 머물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말 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이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비겁하게
침묵으로 아브람의 결정을 인정해 주신것입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모든 사람이 다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도 살 길은 가나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를 하나 더 발견합니다. 즉 신뢰의 문제입니다. 믿는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지 못하기에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에게
계속해서 그를 훈련시키는 영역은 믿음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고난의 훈련을
통해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계속해서 그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의 믿음을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약속으로 보여준 하나님의 뜻을 고난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삶에서 고난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나의 믿음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람에게는 가나안을 주겠다.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영생을 허락하겠다는 약속. 이 약속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 믿음의 내용과 일치되게 하시는
과정이 고난의 시간인 것입니다.
살기 위해 애굽을 선택한 아브람은 아내를 잃어버릴 다른 위협에 직면합니다. 이 고난이 하나님의 뜻을 다시 찾는 전환점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경우 더 큰 위험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은 잘못된 선택을 함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보지 않는
이상 멈추지 않는 고집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잘못된 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위험 가운데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계속 사용 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제불능과 같은 나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 있다는 것을 나의 실수와 잘못에도 버리지도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내가 가장 힘들어 할 때 격려하시고, 공급하시고, 베푸시는 은혜를 통해 지금도 계속해서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나를 향해 약속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확인하고, 고난이
있을지라도 부으시는 충만한 은혜로 반드시 이루어 내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