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2): 선택의 기로에서 솔직한 나의 민낯을 원합니다

                                      

                                   창 13: 1-13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가장 많이 구할 때는 중요한 선택을 할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선택이라는 순간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브람은 늘 선택 앞에 선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늘 롯이 있었습니다.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올 때(11:31), 하란에서 부름을 받고 가나안을 향할 때도(12:5), 기근으로 애굽에 내려가 어려움을 겪은 때에도, 그 후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와서도 롯은 아브람과 늘 함께 합니다(13: 1).

 

그런 롯이 드디어 아브람과 갈라서게 됩니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가 멀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정착한 곳이 좁아서 종들간의 싸움이 자주 생겼기 때문입니다. 서로 갈라서는 9절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장면이 하나 소개됩니다. 두 사람이 살 곳을 선택하는 순간 우선권이 롯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브람이 연장자입니다. 게다가 부모 없는 롯을 입히고 먹여준 은인입니다. 사실 아브람이 먼저 선택을 해도 롯은 원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나타나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것도 아닙니다.

 

온전히 아브람의 자발적인 의사결정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대단한 결정임에 틀림없습니다. 왜 이런 결정을 그가 했을까요? 아브람의 신앙이 성숙 되어서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진짜 아브람의 솔직한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선택에 앞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소돔을 선택하는 경우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연장자이고 롯을 키워준 사람이기 때문에 우선권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롯이 가나안에 남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은 세상의 다른 땅이 아니라 가나안입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애굽에서 잘 경험하여 알고 있기에 안 됩니다.

 

다음으로 자신이 가나안을 택하여 약속으로 준 땅에 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 기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그곳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에 롯을 보내고 싶지 않았을까요? 분명 그에게도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고 싶은 그의 속 마음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 가지 선택 모두가 아브람에게는 문제입니다. 소돔을 택하면 가나안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가나안을 택하기에는 너무 소돔 땅이 탐이 났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선택은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욕심과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내 욕심대로 밀고 나가느냐의 전투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람에게 남은 가능성은 롯이 어떤 선택을 해 주느냐입니다. 분명 아브람의 입장으로서는 당연히 롯이 가나안을 선택할 것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을 것입니다. 이 경우 아브람은 가나안이 아닌 소돔에 살게 되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롯이 선택했기에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롯이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고생한 삼촌에게 좋은 땅을 보답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롯이 아직 어렸던 것 같습니다. 한참 야망에 찬 젊은 날의 롯이 공짜로 온 복을 차버릴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이런 롯의 돌발적인 선택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산전수전 겪은 아브람은 그 정도는 충분히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또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할 경우에도 자신에게는 손해가 안 되는 본전인 것입니다. 어차피 자신은 가나안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가나안을 떠난 애굽에 내려갔을 때 엄청난 고생을 해 본 결과 속으로는 어쩔 수 없이 가나안을 받아들이기로 최종 결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는 아브람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본인이 먼저 가나안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거의 가나안 땅이라고 볼 수 있는 소돔과 고모라에 사실상 욕심을 내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어린 조카 앞에서 잔꾀를 낸 것입니다.

 

은근히 아량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온갖 경우의 수가 머리 속에서 굴러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잔 꾀를 사용하는 것은 믿음의 행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우리는 솔직한 나의 생얼을 드러내고 기쁨이 심령에 찾아올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택 하나를 결정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나의 결정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반드시 체크할 것을 제시합니다.  

 

먼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실리만을 따지는 선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은 늘 우선순위에 주님을 배려합니다. 다음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마지막으로 나 자신이 됩니다. 이것이 ‘JOYful’한 삶을 이 땅에서 누리는 비결입니다.  

 

다음은, 믿음을 변명 삼아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정당화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그 직장에 들어가서 빛이 되겠다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돈 때문에 그 직장에 들어가는 것을 변명하기 위해 믿음을 이용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며 만홀히(업신) 여기는 것입니다( 6:7).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결정은 편안을 멀리해야 합니다. 사실 아브람과 롯 두 사람이 가고 싶었던 소돔과 고모라는 도시입니다. 도시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정주하여 안락함에 도취되기 쉬운 삶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눈에 좋아 보이고, 생각으로 성공할 것 같은 선택을 피하라는 뜻도 됩니다.

 

성도는 편안이 인생 목표가 아닙니다. 성도의 삶은 평강이 되어야 합니다.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은 늘 거친 파도가 몰려 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곳만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도 폭풍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결정은 편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그 폭풍을 견디어 내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평강은 돈과 명예가 주는 편안과는 다릅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고,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점점 더해지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본문 뒤에 14절 이후의 모습입니다. 약속의 땅이 막연하게 지시하는 땅이 아니라 이제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땅과 아브람이 직접 발로 밟는 모든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에게 약속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불안보다는 평강을 누리도록 선처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시기 바랍니다


내 꾀보다는 하나님이 더 원하는 선택을 고르는 복된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