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3): 늘 준비 되어 있기 바랍니다.
창 14: 1-4, 11-16
한 신학교 학생이 여러 이유로 시험 준비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잘 해 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험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시험지에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고 적고 나왔습니다. 결과는 낙제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다 아시기에 100점. 그런데 자네는 아무것도 몰라 0점”이었습니다.
전쟁도 마찬가지 입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강한 자에게 먹힐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사에도 군대를 십만 정도만 양성했더라면 파죽지세로 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순신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임진왜란 하루 전에 거북선이 완성되어 역사를 바꾸게 됩니다.
창세기 14장은 인류 최초의 동맹간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롯이 속한 동맹은 대부분 소돔을 중심으로 사해지역의 왕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강 건너 사람들에게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더 이상 속국이 아님을 선포하게 되고 그것이 전쟁의 기폭재가 됩니다(4절).
이런 자신감의 바탕에는 롯이 동맹한 나라들은 2절에 보면 5왕인데 비해 상대방은 1절에 의하면 4 왕입니다. 12년 동안 조공을 받치다13년째에 못하겠다고 선포한 것도 어쩌면 수적으로 자신들이 우위에 오르는 순간 내려진 결정인 듯 보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이 빼앗기고 롯과 식솔 모두가 잡힙니다(11-12절). 겨우 한 사람이 도망하여 아브람에게 알립니다. 비상회의가 소집하고 전략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훈련된 병사들이라도 그들 역시 놀랐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준비도 어느 정도 걸릴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아브람이 상대해야 할 대상은 동맹한 병사들입니다. 수적으로나 무장에서 개인이 병사를 기른 것과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경험과 훈련 정도가 개인이 가정에서 기른 사병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롯을 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뭔가 확연히 달라진 아브람을 만나게 됩니다.
먼저, 아브람은 주변의 위협을 감지하고 준비를 잘 해두었습니다. 목축을 하며 살아가는 아브람에게 주변 사람들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모든 위험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매우 적극적인 준비를 합니다. 비록 수는 적지만 318명이나 되는 자신의 병사를 길러 언제 올지 모르는 위협을 방비했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군사들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롯을 돕고 싶어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교회가 잘 훈련된 사람들을 키우고 준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셔야 합니다. 잘 훈련 되어서 나 자신도 지키지만 영적 전쟁에서 힘들어 하는 분들을 전 방위에서 돕는 분으로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롯은 어떻습니까? 아브람과 서로 다툴 정도로 양과 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과 같이 병사를 기르고 재산과 가족들을 지킬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점점 소돔과 고모라의 삶에 동화되어 갔을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비용이 적게 드는 조공을 바쳐 안전을 담보 받는 쉬운 타협을 합니다.
롯이 소돔에서 살아가는 삶의 단면을 창 19:9절은 잘 보여줍니다.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 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롯은 소돔사람들에게는 그저 거류 자에 불가할 정도로만 관계를 맺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13절을 보면 좋은 사람들을 이웃으로 만듭니다. 마므레는 ‘부유하다’의 의미, 에스골이라는 사람은 ‘한 가족’ 그리고 하난은 ‘성결’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아브람이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모습입니다.
로 12:18절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우리들은 믿지 않는 이웃들과 잘 지내야 합니다. 살고 계시는 아파트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믿지 않는 한국 분을 찾아가서 교제를 나누기 바랍니다.
성도가 믿지 않는 주변 사람들과 화합을 이루고 좋은 관계들을 형성해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준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분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관계는 전도도 쉽게 만듭니다. 이웃과 말다툼하고 싸운다면 복음 전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올 여름부터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아내를 빌미 삼아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던 모습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롯에 대해 서운한 마음은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떤 희생을 치러도 구원고자 하는 적극성을 보입니다.
즉각 아브람은 집에서 기른 사람 318명을 데리고 갑니다. 롯을 위해 단까지 쫓아갔고(14절)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15절) 이르게 됩니다. 롯과 이별한 후 아브람이 살고 있는 곳은 마므레(헤브론) 상수리 수풀근처였습니다(13절). 그리고 단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언급될 때 가장 먼 북쪽을 말합니다. 상당한 거리입니다.
그러나 그런 비용을 뒤로하고 롯을 구해내는 열정을 보여줍니다. 롯을 구한다고 해서 그의 재산이 다 자신의 것도 되지 않습니다. 자식이 없던 아브람으로서는 상속자로 생각하고 롯을 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출 후에도 롯은 아브람에게로 오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길을 가 버립니다. 본전도 안됩니다.
게다가 밤에 기습을 하여 승리로 장식하지만 사실 자신의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생명이 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된 아브람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 아내를 팔아 먹으려고 했던 철저한 변화된 모습이 이제 나타난 것입니다.
세상은 조건 없이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가까이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영혼을 바라보며 그냥 다가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유한합니다.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연세든 가족들이 계십니다. 이런 긴박한 인식을 마음에 두고 사랑하는 이들의 영혼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성도는 억압 당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성도는 물질과 시간과 위험을 무릅쓰고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렇게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사역을 할 때 세상으로부터 사람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기 바랍니다. 아브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나중 롯을 구출하기 위한 전쟁에 함께 동참하는 동지가 됩니다.
삶에서 어떠한 위험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적극적으로 도울 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더 얻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방학 동안 여러분이 찾는 곳에서 가족들의 영혼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돕는 일에 동참하고 돌아오는 복된 성도님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