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5): 어떻게 살 것을 가르치신다
창25: 5-10
바벨탑 이후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아브람이 창 11:27절에서 소개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175세라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땅에 장사되는 창세기의 첫
모습입니다. 그의 삶을 보면서 성도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신 복을 다 사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땅에서 하나님 뜻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주시는 선물이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주신 복을 다 사용하고 겨우 가나안 땅에 가족을 위해 사둔
막벨라 굴만 소유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나안을 후손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비전으로만 남기고 간 것입니다.
하나님 주신 비전 따라 살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복을 다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섞을 인생 살다가 그냥 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더 좋은 것이 있기에 성도는 땅에서 쌓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누리는
삶입니다. 누리는 삶은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고 남기지 않고 가는 삶입니다.
예화.
마지막 순간이 올 때 아무런 욕심이 남아 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저 영생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남겨 둔 것이 많은 사람은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한번도
사용하지 못한 것이 억울하기에 더 머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더 억울할 것입니다.
둘째,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나누며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나누는 것은 당신이 없으면 나도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셨습니다(창2:18). 이웃이 있어야 나도 살기에 우리는
서로 나눌 수 있고 나누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먼 길을 가며 힘들 때 서로 의지가 되어주고, 힘들면 격려하고, 나누며 살도록 아브라함은
이삭에게만 유산을 주지 않고 다른 아들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떠납니다(5-6절). 사실 우리는 가지고 갈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준 것이고,
다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유산을 우리는 가장 가까운 자에게 줍니다. 그 이유는 그가 가장 어려운 자에게 나누는 삶을 살아갈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아브라함의 자식들 중 이삭만은 자신의 우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사람으로 26장에서 나타납니다. 이삭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 물려 받은 유산인 것입니다.
셋째, 이 땅의 모두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평화를 사랑하시고 땅에 평화가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물리적인 힘으로 막벨라 굴을 헷 족속에게서 뺏을 수 있지만 돈을 지불하고 이 땅의 질서를 지켜 나갑니다(10절).
성도는 질서를 깨드려 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싸울 이유도 없고 사실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인생의 여정을 함께 가는 친구일 뿐입니다. 누가 친구에게 비수를 겨눌 수 있습니까?
살아가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모두들의 도움으로 살아가야 하는 곳이 이
땅입니다.
처음 이웃을 만날 때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묻는다면 쉽게 친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새로 오시는 분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축복을 입에서 내는 사람들은 상대를 죽이기 위해 세상에서 올무를 놓지
않습니다. 타인을 위해 장애물을 치워주며 가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가는 사람은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이 길은 험하니 주의하세요. 피해 가세요.”
라고 글을 남기거나 기다려 알려주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길을 가다 다시 만나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같이 앉아 걸어온 시간들을 나누고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가라고 격려 하는 성도가 될 줄 믿습니다.
넷째, 성도는 주변이 아니라 세상 중심에 선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 한 가운데 서고 싶어합니다.
믿음으로 살면 중심에서 밀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에서 떠납니다.
그 생각과 그 삶은 틀린 것입니다. 믿는 자가 세상의 중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이 항상 우리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중심에 서서 하늘에서 주시는 빛을 받아 어둠을 비추는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의 한 가운데 뿌려져
세상이 섞지 않도록 소금이 되어 살아갑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중심이 아니라 성도들의 주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변에 고개를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세상이 소유하지 못하는 삶이 있어 주목과 관심을 오히려 받습니다. 세상이 갖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세상이 갖지 못하는 평강과 이 땅에서 더 풍성한 삶을 위해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세상 중심에 선 성도는 내 것을 채우기에 바쁘지 않습니다. 늘 주님 우선입니다. 그래서22장에서 귀한 아들까지도 바칠 수 있었습니다. 내 중심에 이생의 자랑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영광 더 드러내도록 더 많은 복을 허락하여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도의 믿음 생활은 하나님이 멈추라고 말할 때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멈추는 날이 하늘 가는
날입니다. 힘이 있을 때까지는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며, 전도와 선교,
친교, 예배에 힘쓰고, 말씀 배우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날은 성도가 나의 사명을 완성하는 순간이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보다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에게로 데려 가십니다(8절). 이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성도는 내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힘이 다하는 그때 멈추어 서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도 언젠가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때 섬기느라 구부린 허리 펴시고 진정한 안식을 주
안에서 누릴 줄 믿습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모든 사람은 주인 되신 분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이 주인 되어 살던 사람도 그때에는 주님에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죽음은 그래서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됨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한 영혼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죽음 이후에 묻히게 됩니다. 자신의
뜻대로 산 사람도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됩니다. 흙으로 만들었기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지은 인간을 향한 그분의 뜻임을 알게 만드십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묻히는 장소를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도 죽으면 반드시 가야 할 곳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나중 자신과 같은 순간을
맞이할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마지막 교육 장소가 바로 여러분의 무덤이 되길 바랍니다. 주를 위해
살다 주가 멈추라기에 멈추어 선 인생이 되기 바랍니다.
성도는 크고 화려한 무덤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 부르심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변으로 몰아내고 내 뜻대로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남들이 가져보지 못하는 명당 자리에 묻히는 그런 죽음을 부러워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누리고 나누며 살다, 주님 부르시면 그래도 남은 것 있으면 그것조차 주님 위해 다 드리고 갈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