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뜻(12): 상처가 남길 원하지 않습니다
창35:1-5
참 부러운 것이
하나 야생 동물에게서 발견됩니다. 인간에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물들이 가진 자연 치유 능력입니다. 스스로 필요한 약초를 먹거나 깊은 잠이나 금식을 통해 상처를 회복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기적과 같이 눈에 확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치유법을 주셨는데 오늘 저는 그것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난 주34장에서 야곱 가정의 아픔을 보았습니다. 디나에게 너무나 큰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 뒤의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궁금한 것을 넘어 놀라게 만드는 것은 성경은 그 이후 그녀의 이름조차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잘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골치
아픈 문제는 무시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문제만 관여하신다. 능력 밖의 것은 아예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생각을 들게 만듭니다.
이런 생각들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해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무능력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뒤 이야기를 숨겼구나. 뭐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옵니다. 사실 성경이 왜 디나의 뒷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지 않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저의 묵상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디나에 대한 이야기를 묻어
버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인간의
삶이 가치 없어 무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리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상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부각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상처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전환시킵니다. 아픔만 바라보면 아프기만 합니다. 그러나 다른 곳을 바라볼 때 상처의 아픔을 뛰어넘도록 돕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치유 방법을 가지고 나타나 주십니다(1절).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사고 전에 좀 막지 왜 항상 사고 후에 나타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해답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또
질문들이 생기겠지요. 그러면 왜 하나님은 나쁜 선택을 하는 자유의지를 막지 못하는 무능력한 분인가?
그리고 사탄은 인간을 늘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마음대로 조종하는 무한한 능력을 가졌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탄보다 더 무능력한 존재인가?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기는 했는데 더 이상 관리 능력은 없는가? 뭐 이런 질문들이 즐비하게 놓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이미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실 때부터 하나님은 능력의 신 임이 인정됩니다. 자유의지는 막지 않기 위해 주신
것인데 막으면 반칙이 됩니다. 자유의지로 자신들이 잘못된 선택을 할 경우 엉망이 되고 만신창이가 될
것도 하나님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엉망이 되어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 계획과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에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창조세계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신앙고백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늘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결승전에 승리자가 최후 승리자인 것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후를 즐기는 분입니다. 사탄이
어떻게 나오던 마지막을 알기에 놀라지도 않습니다, 불안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너무 불쌍하기에 구원의 손길을 베푸십니다.
그것이 1절의 하나님의 ‘나타나심’(계시)이라는
것입니다.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야곱의 가족에 하나님이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믿고 따르기만 하면 아픔 가운데도 상처가 치유되는 능력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이 승리를 맛보는
것이 신앙생활이며 성도의 간증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믿음과 순종입니다. 엘리사
시대 나아만 장군을 잘 압니다. 그의 명성과 지위와 돈이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주어질 때 믿고 가서 일곱 번 물속에 들어가는 순종이 행해질 때 문둥병이 나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디나에게 나타나 주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디나 혼자의 상처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온 가족의
상처를 책임져야 할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을 주었던 것입니다. 말씀은 디나의 상처로 인한 온 가족에 주는
처방입니다. 디나의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디나가 언급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그
증거는 야곱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가족들에게 명령할 때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
해서 뭐해요. 낫지도 않을 텐데. 그렇게 한들 원래대로 제가
돌아갈 수도 없잖아요” 이런 소리 하지 않습니다. 오직 디나의
믿음의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치유되는 것 성경에 예외가 없습니다.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죽은 자가 삼일 만에 살아났다는 믿지 못할 일이 이 천년 전에 일어났다면 지금도
이해 되지 않는 것들 주 안에서 가능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나에게 주님이
말씀하는 것을 이제 순종하기 바랍니다. 첫째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십시오. 하나님
외에 여러분이 의지하고 바라고 믿는 모든 것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이던 사람이던 여러분이
가진 직위이던 어느 것에도 의지하는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만이 반석이 될 줄 믿습니다.
둘째는, 정결하기를 명령합니다. 그래서 야곱 가족은 육신과 안목의 정욕에 따라 구입한 귀고리들을 땅에 묻어 버리는 행위가 일어납니다. 세상에 끌려 죄 지을 수 밖에 없었던 삶을 끊어버리고 주님께로 향해 가는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돌아오기 바랍니다.
새 출발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나를 죄짓게 만들었던 과거의 행위들과 단절하는 회개의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과감히 과거의 자신들의 잘못들과 죄를 철저히 단절하기 위해 땅에
묻어 버리는 행위를 합니다. 그것을 다시 파 내어서는 안됩니다. 반복하는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의복을 갈아 입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 안에서 거듭난 나를 바라 보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언제나 우리는 허물투성이인 과거의 내가 아닌 주의 보혈로 새로워진 나를 매일 보게 됩니다.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도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들에게 주시는 신비스런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이미 우리는 거듭난 성도들입니다. 말씀대로 믿고 따르면 상처로부터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디나의 이야기가 더 이상 성경 본문에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의 아픈 상처는
믿음과 순종으로 이미 다 완전히 치유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세상에서 살다 받은 상처로 인해 아파하는 가족들과 개인들을 말씀으로 치유하십니다 . 믿고 순종하며 따르는 자들에게 회복을 맛보게 하십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