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뜻(14): 캄캄할 때 인내가 답입니다 

39:20-40:8



지난 주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예화 소개. 살다 보면 앞이 캄캄한 일들이 생깁니다. 기다리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또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앞을 막아 설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 답을 요셉에게서 한번 찾아가 보고자 합니다.

 

행복했던 요셉도 노예가 됩니다. 주인 신임도 얻지만 또 하루 아침에 옥에 가게 됩니다. 주인은 변명조차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감옥으로 보내 버립니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자신의 형편을 들어달라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형들이 구덩이에 던지던 때는 살려 달라고 소리치고 애걸했습니다(42:21).

 

그러나 이제는 침묵합니다. 울어도 안 되는 것은 안됩니다. 이 때가 바로 인내해야 할 시간입니다. 언제 인내해야 합니까? 사방이 막히고 캄캄할 때는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문제는 언제까지입니다. 증기기관차를 운행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 큰 덩치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온도가 212도가 되어야 드디어 움직인다고 합니다.

 

결국 주님이 움직일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주님이 직접 문제를 풀어갈 때까지입니다. 다음 질문은 인내하면서 무엇을 배우는가?’입니다.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것이 어리석은 일인가요? 악이 선을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인내는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인생에서 허다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드는 시간입니다.  

 

성도가 인내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앞당기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주님이 내게 오실 때까지 참아내야 합니다. 인내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21절에 참고 견디는 요셉에게 간수장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21절의 주어는 여호와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수들이 옥에서 간수장에게 잘 보여 때로는 혜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간수가 그 사람을 좀 잘 봐 주려고 했다면 주어는 분명히 간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하나님의 개입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인내는 종료되는 것일까요? 40:1절은 그 후에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당장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변화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요셉에게 또 다른 변화가 나타납니다. 감옥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요셉을 감옥으로부터 나오게 할 사람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나타나 감옥에 얌전히 있으면 언젠가는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할 것이라는 약속도 없습니다. 요셉은 앞이 캄캄한 상태에서 그저 기다릴 뿐입니다. 기다림은 앞에 훤히 뭔가 보이는 것이있어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인내하는 사람에게 최대 위기가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뭔가 움직여 가는 것 같은데 아직 손에 뭔가 붙잡히지도 않고, 눈에 드러나지도 않을 때입니다. 지금까지는 오기, 내 힘,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는 하나님의 동행해 주심으로(39:3, 21) 견디어야 위기를 넘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행은 예상치 않은 일을 생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감옥으로 보낸 친위대장이 다시 요셉을 배려합니다. 요셉으로 하여금 왕의 관원 두 사람을 시중들게 합니다. 그들은 비록 왕의 노여움으로(40:2) 감옥에 왔지만, 감옥에서도 수중을 드는 사람을 붙여주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임을 암시합니다.

 

어느 날 이 두 사람이 이상한 꿈을 꾸지만 해석을 못해 근심 가운데 있습니다. 이때 요셉은 당당히 이들에게 말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여기서 놀라게 하는 것은 인내의 시간에 요셉은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이해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인내는 요셉에게 자신감을 품어내게 만듭니다. 요셉은 꿈을 꾸는 사람이지 해석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자신이 꾼 꿈을 해석해 준 것은 형들과(37:8) 아버지 야곱이었습니다(37:10). 그러나 이제 요셉은 꿈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그 의미도 하나님이 갖고 있다는 자신감을 소유하게 됩니다.

 

꿈을 주신 분이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뢰입니다. 놀라운 성장입니다. 인내 가운데 여기까지 성장한 것입니다. 꿈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반드시 그 꿈은 꿈대로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이 와도 주님이 그 꿈을 이룰 때까지 믿음으로 견디는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인내의 결과는 우리를 더 이상 환경의 변화에 예민해 하지 않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환경이 변한다고 고난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은 99도에서는 끓지 않습니다. 1도 더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는 고난의 시간을 참아내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결국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시켜 줍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들은 감옥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믿는 분들이라 할지라도 받는 고난은 때로는 억울하기도 합니다. 생각하면 눈물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내는 우리를 유익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인내는 우리를 소망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5:3-4절 말씀을 암송하시기 바랍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아멘. 인내는 나를 기다리게 한 이유를 보게 하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다르세 말하면 인내해야 답을 보여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내는 성도의 선택이 아닙니다. 광야 인생 길에서 겪어야 할 필수 과목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긴 시간을 인내하면서도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인내를 보여주십니다. 끝까지 고통과 아픔을 참아주셔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랐던 제자 베드로도 고난의 시기에 인내하기를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5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언제 주님이 오실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모두 마지막 때라는 공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때 더욱 성도에게 억울하고 힘든 일이 더 많아질 것을 마 24:21은 말씀합니다.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우리가 어떤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요셉처럼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처럼 인내로서 승리의 삶을 장식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