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뜻(17): 선이 악을 이깁니다

                         창 42:6-8, 17, 21-25



영화에서 적들을 향해 보복하는 장면은 내가 주인공인 듯 속이 시원합니다. 특히 상대방이 악한 사람일수록 고통을 돌려주거나 악을 파괴시켜 버리는 주인공에게 박수를 보내곤 합니다. 선이 악을 이긴다는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합니다.


요셉도 애굽에서 출세하여 형들에게 당한 것을 되돌려 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더 이상 약한 요셉이 아닙니다. ‘인생 새옹지마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제 형들이 요셉에게 절을 합니다(6). 이때 요셉은 두 개의 선택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입니다. 우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자신의 의지를 보이는 것이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삶의 자세입니다. 과연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여러분은 선택하십니까?


대부분은 내 감정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이 경우라면 요셉은 형들을 죽여야 합니다. 조금 도덕적인 사람인 경우라면 법대로 할 것입니다. 법대로 한다 해도, 살인미수, 인신매매(미성년자) 등 엄청난 죄목으로 형들은 거의 모두 중형에 해당될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따라가며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 이때 요셉은 높은 자리에 서서 원수를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품습니다. 악이 선을 이기는 것 같이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냅니다. 요셉의 이 태도가 세상에서의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법대로 처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대로 했다면 그 여인은 다시 바르게 사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율법이 그 여인의 삶 전체를 바꿀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율법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왜 예수님은 법대로 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예수님도 하나님 뜻을 행하고 있지 않잖습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나타내지 못할 뿐 아니라, 온전한 뜻이 나타나기 전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요 14:9에서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이 하신 말씀과 행하신 모든 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복음 또는 진리라 부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조차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나의 자리는 내 마음대로 휘두르는 위치가 아님을 가르쳐 주십니다. 만약 요셉이 자신의 의지대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로 형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당장 밝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힘으로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구덩이에 던졌던 형들에게 그들도 감옥에 넣어 고통 당하다 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우는 시간을 먼저 가집니다. 성경에서 몇 안 되는 남자가 우는 장면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의 비밀병기는 눈물입니다. 요셉은 서러워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서 선이 악을 누르기 위함입니다. 억울함과 분함을 주님이 주신 사랑의 눈물로 녹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쌓아둔 원한들을 흘러 내리게 합니다. 아픔을 빼냅니다. 죽이고자 하는 원한을 식혀버립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려는 사람은 반드시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국무총리가 삼일 시간 내는 것 쉽지 않습니다(17). 그러나 요셉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9).


성도가 기도 가운데 홀로 외로이 흘리는 눈물은 하나님의 위로이며 답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분이 있으면 눈물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눈물에 젖은 옷은 하나님의 뜻이 적힌 답지입니다. 울며 기도할 때 우리는 성령과 교통하는 주파수가 맞추어지게 됩니다. 8:26-27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뜻만 하나님께 아룁니다. 성령은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 우리에게 들으라고 친히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주파수가 서로 달라 영이신 성령의 소리를 직접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비밀이 로8:26에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울며 간구할 때 성령과 주파수가 맞추어집니다. 이때 요셉은 형들의 악한 질투심과 증오심까지도 생명을 살리는 선한 도구로 사용하는 하나님을 봅니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일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이해한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열매를 보게 하십니다. 요셉은 울기만 했는데 은혜로 보답 하셨습니다. 자신이 악을 갚지 않아도 하나님이 선하게 갚아 주십니다. 철면피 같던 형들이 녹기 시작하는 소리가 21-22절에서 들립니다. 요셉에게 한 짓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형제들을 변화시키고 회복시켜 나가고 있었습니다. 회복이 있어야 앞으로 400년간의 노예의 삶에서도 이들이 하나되고 민족을 이룰 틀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서로 불신하고, 흩어져 버리고, 단결하지 않는다면 어찌 민족을 이루어 낼 수 있겠습니까?


이 웅장한 드라마 앞에 우리는 무슨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남들보다 조금 나은 도덕적인 삶을 내세우겠습니까? 아니면 조금 하나님 앞에 충성한다고 자랑하시겠습니까? 세상의 악을 하나님의 선으로 이겨 나가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작아지고 잠잠해 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고백만이 나올 뿐입니다. “하나님, 더 많은 생명을 구원하려고 나를 이 자리에 보내셨습니다. 주님, 이 부족한 사람, 단지 주님 뜻 이루어 드리는 도구에 불과합니다”(45:5). 이 진실된 고백은 선으로 악을 이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닌 주님 앞에 선 자로 늘 살기를 바랍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은 나를 통해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 가에 집중합니다. 눈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과 대치되는 내 의지를 죽입니다. 도덕과 윤리와 법을 넘어 갑니다. 법으로만 악을 대처해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세상에 사랑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도덕과 윤리와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 세상에 심어지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 코넬한인교회 온 성도님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으로 악을 이겨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