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영성(2): 영적 싸움에 이기는 자
삼상 17:33-40, 49-50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갖고 뛰어든 사람은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관심과 열정은 있지만 매번
패배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모습을 통해 우리
역시 영적 삶에서 이기는 방법들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자는
사람의 맞는 소리에도 마음이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맞다’고 해서 다 믿음의 소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33절은 사울의 말입니다. ‘너는 싸울 수 없다.’ ‘너는 어린 소년이다.’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용사다’ 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틀린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에 입각한
말이고 현실을 반영한 분석입니다. 매우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그
어느 누구보다 예리하고 정확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에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럴지라도”라는 믿음의 언어입니다. 사울의 입에는 이것이 부족한 것입니다. 생각조차 해 보지 않습니다. 믿음은 날카로운 분석이나 평가를 기초로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이런 것들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은 이미 330년 전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따져서
불리하면 안하고, 분석해서 약하면 미루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7:1절에 진멸의 대상인 가나안 족속이 언급됩니다. 블레셋은 가나안
족속의 대표 족속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도 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오직 진멸하라'는 말만
하십니다. 만약 그들과 함께 할 경우 진노하사 오히려 이스라엘을 갑자기 멸하실 것이라고 4절에서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명령만 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주십니다. 약속은 명령을
수행케 하는 힘이 됩니다. 여호수아 1:3절의 약속입니다. ‘너희는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라(이미
완료). 너희 영토가 되리라(4절). 너희 평생에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내가…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5절). 이 보다 더 강한 담보가 어디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이 약속에
근거하여 믿음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비롯한 한 사람도 믿음을 가진 자가 없는 불쌍한 처지입니다.
그렇다면
왕을 포함한 많은 백성들을 사로잡는 두려움은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답은 수 1:8절에 있습니다. ‘이 율법 책을 입에서 떠나지 말고 주야로 묵상하라
그러면 네 길이 평탄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9절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않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약속에 근거하여 환경이 엄청 너희를 겁나게 만들어도 놀라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울과 이스라엘이 두렵고 떠는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면적인 위반이며 불신입니다. 성도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맞는 말에도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더 우선 시 할 때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자는
먼저 불신의 사람을 대항할 수 있어야 강력한 영적 적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33절과 34절
앞 부분을 대조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33절에는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라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34절에는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라고
정확히 대구를 이룹니다. 아이가 믿음 없는 어른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경험도 없는 사람이 불신 가운데 빠져 있는 베터랑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의미 있는 문장
구조입니다.
목동에
불과하지만 왕 앞에 하나도 꿀리지 않고 당당하기만 합니다. 이 모습을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불신의 사람에게 밀리는 사람이 영적 존재인 사탄에게는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먼저 사울에게 대차게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모습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의를 저버리고, 나이든 어른들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누구이든 진리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경험과 인간의 지식과 이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0:4절에서는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드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린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어느 곳에서 어떤 누구를 만나도 밀리지 말고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역사 하십니다.
이런
태도는 상대방을 깔보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상대방이 알게 됩니다. 37절에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반응합니다. 그렇게 철저히 현실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사울 왕도 다윗의 믿음의 소리에 동조하고 오히려
믿음을 가지는 모습을 또한 보여주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믿음은 공동체를 분리 시키지 않고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영적 싸움에 이기는 자는 전쟁터에서 자신이 훈련하여 익숙해진 것을
무기로 사용해야 합니다. 사울이 다윗의 믿음의 소리에 감동을 먹습니다. 자신의
군복과 투구, 갑옷과 심지어 자신의 칼까지 다윗에게 채워줍니다(38-39절). 당연히 맞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은 당시 어른이고 다윗은 소년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사울을 소개할 때 그는 키가 모든 백성들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다고 삼상 9:2절에서 언급합니다.
반면에
다윗은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배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고
삼상 16:12절은 소개합니다.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다윗이 모습입니다. 사울의 큰 키에 맞는 것들은 아무리 전쟁에 필요할지라도 다윗에게는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념해서 보아야 할 것이 따로 있습니다. 성경은 ‘맞지 않다’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39절을
보면 “익숙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맞지 않다’와 ‘익숙하지 않다’는
굉장한 어감의 차이가 납니다. 맞아도 사용해 보지 않았기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맞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는 두 가지가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익숙하지 않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다윗에게 익숙한 무기가 소개됩니다. 35절을 보시면 곰이나 사자가 와서 양을 물어가면 따라가서 그것들을
‘쳣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자나 곰을 치는 무기는 무엇일까요? 40절을 보면 물매입니다. 결국
사자와 곰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과 가장 자신이 익숙했던 물매를 사용했기에 그들을 죽일 수가 있었던 이유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과 동행하는 우리의 무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에게 함께 하는 무기는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6:17에서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 무기 중에 공격에 쓰이는
것은 유일하게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싸움에
이기는 자는 “익숙하지 않은”(39절) 무기를 가지고 적에게 덤비지 않습니다. 성도는 말씀에 익숙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믿음이 없다는 것은 말씀이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주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의 3가지 시험을 모두 말씀으로 이겨냅니다. 말씀에 익숙해 지지 위해서
이번 가을에는 성경을 일독하는 그룹들이 생기기 바랍니다. 그리고 암송해서 내 것이 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자는 익숙한 무기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 무기 안에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것을 넣어 사용했기 때문에 이긴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의문을 풀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주신 믿음을 가지고 싸움터로 나아갑니다. 다윗이 곰과
사자를 죽인 경험이 그를 담대하게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일어나게 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그 믿음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양을
지키는 목자는 노인이나 주로 아이들이 그 일을 맡게 됩니다. 그들은 일가를 마치면 불가에 앉아 늦은
밤까지 노인들로부터 조상들의 이야기를 듣곤합니다. 다윗에게 가장 최근의 역사는 바로 사사 시대였습니다. 많은 이야기들 중에 어린 다윗의 마음을 끄는 것은 베냐민 지파의 물매를 돌리는 특수부대 이야기였습니다(삿20:16). 자신은 어리기에 혹시 덤벼드는 짐승들로부터 양떼를
지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답을 찾은 것입니다. 목동에게 지팡이가 있지만 근접해야 사용할 수 있고
타격을 강하게 줄 수 없고 자신이 당할 수 있는 약점이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물매가 가장 매력적인 도구로 등장합니다. 먼 거리에서 짐승을 강하게 타격을 주어 제압할 수 있는 무기인
것입니다. 다윗이 노인들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날로부터 다윗은 좋은 돌을 고르고 어떤 상황에서도 목표물을
맞추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어느 날 새끼 양이 사자에게 물려갑니다(34절).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양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이라는 철저한 소명의식이 어린 다윗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따라가서 사자와 곰을 쳤다고 35절에서 합니다. 물론 목동의 지팡이로 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말이 안됩니다. 사자가
다윗이 가까이 올 때까지 가만히 있으면서 ‘나 잡아 가세요’ 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5절의 ‘따라가서
치고’라는 표현은 뛰어가서 물매로 맞출 거리까지 근접하여 돌로 사자를 쳐서 기절 시켰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수염을 잡고 죽였나이다’ 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돌에 맞아 어리둥절해 하는 짐승을
잡아 죽이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그대로 골리앗을 죽이는 모습에도 재연되고 있습니다. 49절에 이마에 돌을 맞은 골리앗이 엎드려집니다. 50절을 보면
물매 돌을 사용하여 골리앗을 “쳐 죽였다”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쳐 죽여”라는
표현은 물매 돌로 타격하여 결국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 확실해 집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익숙한 물매 안에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돌맹이를 넣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다듬고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자연산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적을 대할 때 경험과
습득한 지식과 날카로운 이성이 적을 이기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물매를 사용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물매 안에는 반드시 시냇가의 매끄러운 돌이 사용되어야 합니다(40절). 매끄러움은 인간이 갈고 닦아 된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자연스럽게 물에 굴러 모난 부분이 깎여 나간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돌아다니는
사탄을 타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말씀의 묵상입니다. 마음속에서 되새김 된 말씀만이 사탄을 대적하는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사색의 계절 가을에 말씀을 읽고 묵상의 능력을 키우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